나는 농담으로 과학을 말한다

🔖 플라스틱의 성장은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한다. 괜히 현대를 플라스틱 시대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플라스틱 제품은 고장 나거나 파손되면(흑은 싫증 나면) 언제든 다른 플라스틱 제품으로 대체할 수 있다. 압도적인 범용성! 그래서 역설적으로 플라스틱 자체를 대체할 물질은 아무것도 없다. 설혹 그런 물질이 있다 하더라도 단가가 맞지 않는다. 그야말로 자본주의 정신이다. 자본주의에서는 화려하지만 저렴해야 하며, 넘치게 생산하고 금세 바뀌지만 변하지 않아야 한다. 독점이라면 이루 말할 데 없이 완벽하다.


🔖 <legendary, lexical, loquacious love> (1996)


🔖 어느 순간 우리는 결정을 할 필요가 없어지고 있다. 차라리 광고가 섞여 있어 어떤 것이 진짜인지 가려야 했던 구글 이전의 검색 사이트가 우리에게는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업데이트가 되지 않아 실수를 종종 하는 내비게이션이 우리를 계속 생각하게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일은 할수록 는다. 운동을 해야 근육이 늘어난다. 결정을 내리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세세한 부분에서 결정을 내려봤던 경험이 결정적 순간에도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도와준다. 그런데 인간은 이제 그 기회를 완전히 빼앗겼다. 평균적으로 우리는 더 안전하고 더 효율적인 사회로 가고 있고, 그것은 옳다. 하지만 일말의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 자유는 20세기 중요한 가치였고, 그 가치를 좇은 이들의 노력으로 세상은 이전보다 더 좋은 곳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21세기 뇌과학은 자유라는 것도 우리가 받은 자극의 결과일 뿐이라고 폭로한다. 데이터가 모이면 모일수록 데이터는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어떤 판단을 내릴지 알게 된다. 우리는 자유롭게 무언가를 선택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선택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조작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정보와 자유를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가 있다면 모든 것이 다 밝혀지고 데이터화되어도 상관없다. 데이터를 초월해 우리는 자유롭게 결정을 내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자유롭지 않기에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 선거를 포함한 우리의 모든 선택은 조작될 것이다. 자유롭게 선택했다고 느끼기에 문제 제기도 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가 조작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가치를 내세울 수 있을까.


🔖 데이터과학자 다비도위치는 자신의 책 <모두 거짓말을 한다>에서 이렇게 예언한다.

“차세대 킨제이는 분명 데이터과학자일 것이다. 차세대 푸코는 분명 데이터과학자일 것이다. 차세대 마르크스는 분명 데이터과학자일 것이다. 차세대 소크는 분명 데이터과학자일 것이다.”

그의 말은 옳다. 앞으로는 어떤 분야든 새로운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데이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차세대 예수와 무함마드, 심지어 괴벨스까지도 데이터과학자일 것이다. 심지어 무분별한 빅데이터 사용을 반대하는 시민운동가 캐시 오닐조차 데이터과학자다. 우리의 사고는 이미 데이터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모든 주장에는 데이터가 필요하다. 그것은 옳고 그름, 좋고 나쁨과는 무관하다. 나쁘다 해도 피할 수 없다.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어떤’ 데이터과학자가 되느냐 하는 것뿐이다. 그 선택까지 데이터가 대체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 리눅스 제작에 참여했던 에릭 레이먼드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당과 시장>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성당과 시장이란 기존 제작 방식과 새로운 제작 방식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이다. 중세 시절 성당 혹은 수도원을 생각해보라. 중세는 신이 가장 중요한 시절이었고, 수도사 중에는 능력 있는 사람이 많았다. 수도원에 틀어박혀 자신의 재능을 썩혀가던 그들은 지루함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것을 많이 만들어냈다. 그들은 수도사이면서 동시에 개발자였다. 하지만 길었던 중세 시대를 생각해보면 그들의 개발은 느리고 비효율적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시장은 정 반대다. 상인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소비자와 동료 상인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기존 제품을 보강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었다. 르네상스는 혼란한 시기였고 비효율적인 순간이 많았다. 하지만 전체 결과를 놓고 보면 르네상스는 중세 시대보다 훨씬 바르게 발전했다.

성당과 시장 중 꼭 어느 방식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성당식 개발이 필요한 경우도 있고, 시장식 개발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하지만 레이먼드는 프로그램 제작에서만큼은 시장 방식이 성당 방식보다 유용한 경우가 많다고 주장한다. 성당식 개발에는 주축이 되는 인물이 필요하고, 이들의 의지가 강하게 작동한다. 하지만 사람이 늘 열정적인 활동가일 수는 없다. 특히 돈이 안 되는 오픈소스 작업이라면 더 그렇다. 반면 시장 방식에서는 다소 게으르고 그다지 큰 목적을 가지지 않더라도 다수의 사람이 조금씩 참여해서 큰 성과를 낼 수도 있다.

책임감과 능력이 뛰어난 개인이 오히려 개발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중간 과정을 보여주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자존심이 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그들은 성당식으로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내서 그 결과만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뛰어난 능력과 책임감이 오히려 발전 속도를 늦추는 셈이다. 레이먼드는 “결과가 멍청하더라도 과정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공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과정을 다른 사람이 살펴봄으로써 문제를 파악하고 더 나은 해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 특허권과 지적 재산권은 타당해 보인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 기술을 개발한다면 응당 그 대가를 받아야 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대가는 당연히 돈이다. 개발자가 돈을 벌 수 있도록 특허권을 인정하고 보호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오픈소스 진영은 적어도 프로그램만은 특허권을 다소 침해하더라도 공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가령 천 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이어서 올라가는 것이 가능하다면, 300번째 계단에서 301번째 계단까지는 한 계단만 더 오르면 된다. 그러나 이어서 올라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앞의 사람의 300번째 계단까지 올랐다 하더라도 1번부터 다시 올라야 한다. 이렇게 되면 모든 과정에 천재가 필요하다. 300번까지 오르는 데도 천재가 필요하고, 301번까지 오르는 데도 천재가 필요하다. 천 개를 오르려면 천 개를 단번에 오를 수 있는 천재가 나타나야 한다. 하지만 한 단계씩 나눠서 올라간다면 평범한 사람이라도 모두 조금식 역할을 할 수 있다.


🔖 선생님: 빅터, 넌 훌륭한 과학자가 될 거다.

빅터: 하지만 아무도 과학자를 좋아하지 않아요.

선생님: 그렇지 않아. 사람들은 과학이 가져다주는 걸 좋아한단다. 단지 과학이 던지는 질문을 싫어할 뿐이지.

— 프랑켄위니


🔖 소닉헤지호그 유전자는 1993년 하버드 대학의 로버트 리들 박사가 발견했다. hedgehog는 고슴도치라는 뜻으로, 유전자의 모습이 고슴도치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 소닉헤지호그는 실재하는 고슴도치가 아니라 게임회사 세가의 마스코트 소닉 더 헤지호그에서 따왔다. 리들 박사는 딸을 위해 딸이 좋아하는 캐릭터의 이름을 자신이 발견한 유전자에 붙인 것이다. 이 이름 때문에 헤지호그 유전자를 억제하는 물질에는 로보트키닌(소닉의 악역 '닥터 에그맨'의 다른 버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과학자도 자신만의 사고관과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가 밝혀내는 과학적 사실은 분명 객관적인 것이겠지만, 그가 그 과정에 이르는 데는 그의 방향성이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철학자는 새로운 발견(혹은 발명)에 대해 해석을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과학적 발견 혹은 발명은 세상을 바꿔놓을 것인데, 철학자들은 그 과정을 전혀 알지 못한다. 얼학의 아노미 상태에서 과거만 아는 똑똑한 멍청이들은 앞장서서 세상을 망친다. 다들 나름의 철학적 해법을 내놓지만, 과거의 잔재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사회에는 어떤 이념도 없고, 세상은 점점 나빠진다. 그나마 기술의 발전이 이런 후퇴를 가리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어쨌든 세계가 발전하는 것처럼 보여 문제가 드러나지 않지만, 철학의 부재는 언젠가 우리를 지옥을 몰아 넣을 것이다. 우리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후퇴하고 있다.

심각해지는 빈부 격차와 경제 위기는 다시 우생학을 깨운다. 우리는 우생학의 망령을 넘어서지 못했다. 단지 그들이 일으킨 끔찍한 범죄 때문에 그대로 묻었을 것이다. 자국 우선주의, 난민 사태, 모든 것이 이전과 달라지지 않은 우리의 빈곤한 철학을 보여준다.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철학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과학을 알아야 한다. 군대를 군인에게만 맡길 수 없듯이 과학을 과학자에게만 맡길 순 없다. 그러기에 과학은 너무도 중요하다.

물론 철학도 마찬가지다.